나는 빚을 많이 지고 있는데 이제 갚을 길이 없어졌다.
갚아야할 대상이 없기때문이다.
1964년 당시 국민학교 6학년 여름방학 이후로 기억된다.
아들이 공부를 하는지 뭐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던 아버지께서 책상을 새끼줄로 묶어 어깨에 메고 동네에 들어서면서 부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시면서 오신다.
아마도 6Km가 떨어진 읍에서 책상을 메고 오시면서 부터 계속 흥얼거리면서 오셨을것이다.
말이 책상이지 요즈음 방바닦에 발을 개고 앉는 책상이다.
그때까지 공부는 방바닦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하거나 밥상에서 했다.
그당시 시골에서는 의자가 있는 책상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때까지는 아버지가 자식들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날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관심이 전혀 없었던것이 아니고, 형편때문에 다만 말을 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책상을 사오시게 된 동기는 작은아버지께서 "정기는 집안 종손이므로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것 보다 제가 가르칠테니 중학교는 서울에서 다니게 하세요" 했던것 같다.
당시에는 중학교도 자기가 원하는 학교를 전기와 후기로 나눠 지원하여 시험을 치른후 합격을 해야 중학교에 진학했었다.
전기에서 떨어지면 후기학교를 지원해서 두번의 기회를 갖게 되는데
입시철 어느날 아버지께서 서울 대신중학교 입학지원서를 가지고 오셔서 담임선생님께 써달라고 부탁하러 오신것이다.
비록 대신중학교는 당시 3류학교라고 했는데 시골에서 그런 학교에 진학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담임선생님도 내 실력으로 진학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버지께서 원서를 가져 오셨으니 그냥 써 주신것 같다.
담임선생님이나 학교 친구들은 잘 몰랐겠지만 아버지께서 책상을 사오신 후부터는 서울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이웃동네에 서울대학교를 다니다 머리가 너무 비상해서 정신 질환을 알고 잠시 시골에서 요양중이던 친척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이 개인 과외를 해주겠다고 해서 학교에서 과외하고 집에오면 저녁 10시정도 되는데 그때부터 12시까지 개인 지도를 받고 있었다.
입학지원서를 써달라고 오신 아버지의 모습이 개선장군의 모습이 저럴 것이라 생각이 들 정도 의기양양해 보였다.
합격자 발표하는날 사건이 있었으나 그게 여기에서 말하고져하는 내용이 아니므로 생략하고, 시험 결과 몇등으로 합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기 중학교인 대신중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1학년 겨울 방학 전까지는 담임선생님의 특별 관심으로 학교를 잘 다니게 됐는데 겨울 방학때 집에 와 있는중 사건이 발생해 겨울방학을 마치고 개학하여 시골로 전학을 오게 됐다.
작은아버지는 당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조카가 많이 아쉬웠으나 나의 고집이 워낙 강해서 중학교를 읍에서 마치게 됐고, 고등학교를 전주로 진학하게 됐다.
중학교 학비는 얼마 되지 않아서 부모님께서 가르쳤으나 고등학교는 학비도 비싸고, 객지라 하숙이나 자취를 해야 했는데 작은아버지는 작은어머니와 상의해서 전주에 집을 사서 거기서 학교를 다니게 하자고 하셨으나 그렇게 되면 밥을 제대로 먹고 다니지 못한다고 하숙을 하였다.
고등학교 3년을 학교 수업료는 물론 하숙비와 용돈을 매월 보내주셔서 학교를 마치게 됐다.
이와 같이 작은아버지는 조카가 잘돼야 집인이 일어난다고 온 정성을 다해 가르치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게 부담이돼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해군에 자원해 군대에 들어 갔고, 제대후 진학하지 않고 취업을 했으며, 결혼도 좋은 집안으로 장가갈 수 있는데 형편이 어렵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고 반대를 했고, 결국 결혼식장에도 오시지 않았다.
한마디로 작은아버지께서 조카가 잘돼 집안을 일으키킬 바랬으나 그 뜻에 거스리는 조카가 돼 작은아버지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했다.
가끔 작은아버지의 은공을 생각하면 마치 아브라함고 롯의 관계를 연상하게 된다.
작은아버지 말년에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하는 일을 집사람이 자주 찾아가 바람도 쐐주고, 식사도 하면서 조금이나마 같이 해주니 그제서야 정기가 장가를 잘 갔다고 칭찬해 주셨다.
집사람이 그렇게라도 해서 작은아버지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니 고맙고, 감사하다.
그러난 나는 아직 작은아버지의 은혜를 조금도 갚지 못했는데 향년 92세로 하나님 품으로 돌아 가셨다.
작은아버지의 말년은 참으로 쓸쓸하고 외롭게 보내셨다.
48세이던 1974년12월에 후두암으로 성대를 제거하여 직장도 그만두시고, 일반사람과 대화가 어려운 상태로 지금까지 살아오셨다.
그 전까지만 해도 5.16군사혁명에 공이 있어 승승장구하며 사셨고, 후두암 제거후에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보니 친구나 지인들도 원할한 대화는 아니었으나 어느정도 소통이 됐는데 한번의 실수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자 모두 다 떠났다.
대화가 원할치 않아도 신체적으로 건장했을때는 친척도, 친구도 예전과 같이 존경받아 왔는데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오고, 신체적으로 노쇄해지니 아무도 찾아주지않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셨다.
그런중에도 소천하시기 전까지 조금은 위로가 된것은 군대 친구 2명이 지금까지 같이하다 한분이 얼마전에 돌아가셔서 남은 한분과 말년을 그런대로 지내셨고, 시골 동네 한 후배는 명절때마다, 기회가 될때마다 찾아뵙고 인사하는 한분이 있었다.
상중에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이런 작은아버지를 좀더 위로하고, 자주 찾아 뵙지 못해 그 빚이 남아 있는데.....
영세명 "필립보" 천국에서 봬요~~
작은아버지께서 본인의 입으로 "부모를 공경하라!, 형제 우애하라"고 직접 말씀은 하시지 않았으나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긴것은 부모공경이고, 형제우애였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형님과 형수님이시다"
"배우지 못한 형님이지만 가족 사랑과 집안을 돌보시는데는 내가 따라갈 수 없다."
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종손으로 집안일을 모두 도맡아 하셨고, 집안의 대소사 수많은 큰일들을 아무런 불평없이 내조하시던 어머니를 존경하셨던 것 같다.
본인의 자녀들에게는 뭐라고 유훈을 남기셨는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보여진 작은아버지의 모습은 형제 우애를 무었보다 중요시 하셨던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리 형제는 불협화음이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다.
출생 : 1927. 04. 23(음)
소천 : 2018. 02. 03 21:00
화장 : 2018. 02. 06 10:00
봉안 : 2018. 02. 06 14:00
[ 입관 2018. 02. 05 15:00 ]
[ 봉안식후 충혼당으로 ]
[ 국립 서울 현충원 충혼당과 봉안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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